셀 수도 없이 많은 소개팅을 해보니 이제 강남역 7번 출구에서 처음 서로를 알아보고 다가오는 발걸음만 봐도 이 사람이 나에게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그 복잡한 7번 출구에서 내가 있는 곳에서 반경 1m 안으로 들어온 그녀의 발걸음이 슬슬 빨라진다. 아직 어디서 저녁을 먹을 지도 정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어디론가 뛰다시피 걷고 있다. 혹시나 주위 사람들이 우리가 오늘 데이트하기로 한 사이라는 것을 눈치채이고 싶어하지 않는 것 같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보아 오늘 그녀와 잘된 가능성은 거의 없다.

나름 비싼 밥을 먹으러 와서도 그 느낌은 점점 강해진다. 회사원인 그녀는 다행히 학생보다는 훨씬 개념은 있는 것 같다. 이것저것 물어보면 대답은 잘해주지만 나에 대해서는 거의 물어보지 않는다. 그냥 회사 업무로 만난 사람처럼 겉도는 이야기만, 일부러 더 겉돌아 가면서 이야기하고 있다. 가끔 눈을 마주치면 나는 얼굴을 잘 뜯어본다. 분명 내가 만나기에는 지나치게 이쁜 얼굴이다. 눈에는 만약 수술한 것이었다면 분명 비싼 곳에서 했을 것이 분명한 쌍꺼풀이 있다. 이런 분이랑 소개팅을 해줄 정도로 날 좋게 봐준 그 후배 여자애가 눈물 겹게 고맙다. 그렇지만 어떡하냐.. 모든 예의를 다 지키고 있는 와중에도 이 사람은 나를 계속 만나고 싶지 않다는 것을 온몸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하긴, 내가 생각해도 나 같은 남자를 굳이 소개팅에서 만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진짜 서울대생답게 생긴 얼굴과 몸매, 나이는 서른이 다 되어가고 있는데 아직도 돈 못버는 학생. 그저 오늘 하루의 소개팅만이라도 할 수 있게 해준 후배가 고마울 따름이다.

20대 초반에는 대학생 때 씨씨로 풋풋하게 사랑하다 서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태로 결혼하는 것을 상상했다. 그렇지만 가슴아픈 짝사랑만 남긴 채 어느새 나는 20대 중반이 되고 말았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순수함은 모두 상실해버렸고 어느새 여러 여자 경험해보는게 차라리 나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그냥 생각없는 연애를 시작했다. 이런저런 경로로 여러 여자를 거쳐가면서 점점 나는 생각이 없는 사람이 되어갔고, 거짓 사랑을 외치면서 내 속에 있는 흑심을 굳이 감추려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20대초반의 심장이 타들어갈 것 같은 감정은 찾을래야 찾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게다가 쌓은 스펙도 없이 나이만 먹어버려 한때는 학벌 때문에 조금은 먹어주던 소개팅 자리에서조차 개차반이 되어버렸다.

직장을 가진 친구들은 나름 자기만의 연애사를 만들어가고 있는 요즘 나는 점점더 외로워지고 작아진다. 이러니 역설적으로 지금만큼이나 스스로에 대한 자존심이 없었던 20대 초반의 바램이 떠오른다. 맹세코 그때는 여자를 만나 키스를 하는 것조차 상상을 할 수가 없었다. 지나치게 소심했던 나는 그냥 아는 여자와 단둘이 학교밥을 먹는 것조차 가슴이 쿵쾅거리는 일이었고,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을 하는 것은 진짜 일제시대때 일본 경찰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저 나는 한 여자의 친한 친구가 되고 싶었을 뿐이고, 극도의 친함이 어느 순간 연애 감정으로 바뀌길 기대할 따름이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해 너무나도 모르는 두 사람이 함께 도와주며 현실을 개척해나가는 연애, 그리고 결혼을 상상했다. 그렇지만 그런 어린 시절의 꿈은 당연하다시피 이루어지지 않았고 나는 진정한 고백을 할 기회조차 없이 어느새 마음 의지할 곳도 없이 소개팅이나 겨우겨우 받아먹는 어른이 되었다. 그 소개팅조차 이제 쉽지 않지만.

소개팅을 하고 집에 들어와서 피곤하고 지친 마음으로 잠이 들었다. 오랜만에 꿈을 꾸었는데 그녀가 꿈에 나온다. 잘 상황은 기억나지 않지만 뭔가 내가 꿈속에서는 대단한 일을 해줬나보다. 다른 친구들이랑 같이 있는 그녀의 눈빛이 빛난다. 나에게 격려와 응원, 그리고 호감을 보여주는 눈빛 같다. 확실한 것은 분명 현실 세계에서 나는 그녀가 내게 그런 표정을 지어주는 것을 본적이 없다. 아마 그런 눈빛을 느꼈다면 어린 날의 소심한 나도 과감한 고백을 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꿈속의 나는 이제야 내 바램이 이루어질 수 있겠다싶었다. 아마 꿈속의 잘 기억나지 않는 상황이 지나고 둘이 같이 저녁이라도 먹게 되면 아마 난 이야기했을 것이다. 너무 오랜 시간 지나왔지만 다시 풋풋해져버린 우리는 이제 연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이제서야 진정한 사랑을 시작할 것이고 온전히 한 사람을 위해 바칠 수 있는 삶을 살 것이라고. 그러나 나의 꿈은 현실에서 못다한 그 한 마디를 읊조릴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나는 서늘한 2009년의 아침을 깨고 말았다. 어딘가에서 나의 옛 짝사랑은 결혼 준비에 바쁘고, 어제본 소개팅녀는 무지 썰렁한 답문만을 남겨준 이 서울에서 말이다.

죽기 전에 못다먹은 빵이 생각나겠는가, 못다이룬 꿈이 생각나겠는가. 무한동력의 주인공에게 꿈을 주는 이 한마디. 소시민적인 나는 그냥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루는 것이 단 하나 가지고 있는 꿈이다. 20대가 저물어가는 지금의 나는 못다한 고백이 생각날 뿐이다.

Posted by 주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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